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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 연구원이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N사 개발자?!

April 07, 2021

J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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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트럭에 치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증권사 연구원이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N사 개발자?!

갑자기 트럭에 치여서 이 세계로 전이된 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시나리오는 만화나 판타지 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뻔한 이야기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벗어나서 이 세계에서 하고 싶은 일하면서 편하게 사는 상상은 누구에게나 달콤한 상상이다.

2017년, 삶에 불만족하며 증권사를 다니던 나에게 앞으로 인생에 펼쳐질 일들을 말해 준다면, 마치 뻔한 이 세계 스토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실의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나의 삶은 달라졌고 이제 N사 입사가 확정되어 입사일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어쩌다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 미래의 나와 누군가에게 참고할 수 있을 듯하여 기록을 남긴다.

증권사를 나오다.

“너 미쳤어? 죽을래?”

증권사에서 종종 듣던 말이다. 요즘 증권사는 안 저렇길 바란다. 새벽까지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했다. 나는 수직적인 문화와 개인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는 업무 시간에 지쳤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실수를 하면 돌아오는 질책.

자본의 힘으로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길이었다. 꿈을 위해서는 모든 걸 참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원하고 생생하게 원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믿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몇십 년이 지나도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저 몸과 마음이 한없이 축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을 좋은 곳으로 바꾸기는커녕 나의 작은 세상이 한없이 마모되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결심했어. 나가야겠다. 이곳에 있어서 잘되어 봤자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들처럼 변해 있겠지.

그만둔다고 말했다. 그가 말했다.

“니 대학으로 이만한 회사 또 올 수 있을 것 같아? 잘 생각해.”

나오길 정말 잘했다. 두고 보자고 내가 어떻게 되는지.

블록체인, 변화의 시작

마침 세상에 블록체인이 등장했다. 30원에 샀던 에이다가 몇천 원이 되는 것을 보며 세상이 바뀌는 변곡점에 서 있다고 느꼈다. 이 돈은 다른 코인에 투자에 -98% 정도의 손실을 보고 다 날려 버렸지만, 세상이 뭔가 바뀌어 간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사업에 미친 친구 K군과 룸메이트로 같이 살고 있었다. K군은 사업에 미친 사람이라서 항상 사업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성적인 친구였다. 이 친구는 블록체인을 가지고 사업을 해보기 위해 블록체인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었다.

K군은 블록체인에 미친 나머지, 블록체인 쪽 사람들이랑 먹고 자면서 공부하느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K군이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게 아닌지 걱정된 나는 그곳에 한번 놀러 가 보았다. 일반 가정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블록체인에 관해서 토론하고 있었다. 창립자, H와 Y와 M, 세 사람을 만났고 그들이 거대한 무언가를 블록체인을 통해서 만들어나갈 계획을 들었다. 멋져 보였다. 재밌어 보였다.

“저도 같이 살아도 돼요?”

Y의 꿈에 가득 찬 미래를 옆에서 같이 들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같이 살면서 블록체인 공부를 시작했다. 모아놓은 돈도 없었는데, 강남에서 공짜로 재워준다니 환상적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 사람들이랑 멋지게 성공해 보이리라.

당시 대한민국에는 블록체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정말로 없었다. 블록체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되면, 도와달라고 부르는 곳이 정말 많았다.

아예 개발을 배워서 개발자 전향을 할지, 아니면 블록체인을 잘 이해하고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문돌이가 될지 고민했다.

당시 나는 돈이 없었다. 개발한다면 이걸로 돈을 벌게 될 때까지 너무 긴 시간이 사용될 터였다.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제대로 공부하고 이해하면, 사회에 임팩트를 주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 H와 Y와 M도 다들 개발자가 아닌데도 블록체인계에서 임팩트 있는 사람인데, 나라고 그렇게 못 할 이유는 없다. 개발이 재밌기는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렇게 된 거 사업으로 큰일을 해보겠어

“혹시 우리 프로젝트를 좀 도와주실 수 없으실까요?”

세상에 블록체인을 깊이 공부한 사람은 적었지만, 블록체인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대한민국에서 블록체인을 가장 잘 아는 커뮤니티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자문하는 기업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K군과 나에게 기회가 왔다.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돈을 벌어볼 수 있게 되었다. 한 회사를 도와주니, 그 다음회사, 그다음회사, 꼬리를 물고 요청이 들어왔다. 커뮤니티가 커짐에 따라 나와 같이 블록체인 컨설팅 사업을 할 만한 똑똑한 친구들도 생겼다.

K군은 사정이 있어 다른 회사를 창업해서 나갔지만, 커뮤니티에서 만난 똑똑이들과 블록체인 컨설팅 회사를 창업했다.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다. 종일 블록체인 토론만 했다. 고객은 늘어나고 한국 시장에서 내가 만든 회사의 명성이 점점 올라가는 재미를 느꼈다.

회사의 매출이 늘고 우리를 찾는 회사도 늘어감에 따라, 사람을 더 뽑았다. 똑똑한 사람들을 뽑아 블록체인을 가르치고 컨설팅을 가르쳤다. 컨설팅 경력이 있으신 분을 모셔서 컨설팅을 배웠다.

회사의 역량은 늘었다. 하지만 돈 벌어서 직원들 월급 주고 보너스를 주다 보니 내 앞에 남은 건 없다. 월급 줄 돈이 없어 창업자들 월급이 밀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블록체인의 겨울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우리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줄었다. 코인 가격은 블록체인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거래소에 상장해서 마케팅을 잘해야 오르는 것이었다. 블록체인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를 고민해 주는 우리 회사 솔루션의 market fit이 점점 사라졌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지 않았다. 우리가 기대하던 수준 이하의 고객사와 일하지 않으면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상황은 절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이러려고 사업 시작한 게 아닌데…

공동창업자가 떠났다. 내가 제일 믿고 의지하던 S였다. S가 없는 회사에는 더욱더 미래가 없었다. 모두에게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고 그만두자. 그만뒀다.

개발자 여정의 시작

블록체인을 공부하려면 기술적인 것들을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암호화가 어떤 원리인지, 데이터가 어떤 식으로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지, 네트워크 보안이 어떤 것이고 어떤 식의 공격이 가능한지 등 말이다. 개발자는 아니었지만, 개발자와 자주 이야기했고, 개발은 몰라도 기술적 지식을 익히는 데에는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다. 블록체인을 공부하는 동안 ‘개발자해도 괜찮을지도…?’ 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자기는 개발자 하면 잘할 것 같아”

컨설팅 일을 하면서 취미로 코딩을 공부했다. 여자친구랑 같이 공부했다. 파이선 기본 문법을 배웠다. 여친은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한 명인데, 내가 여친보다 훨씬 빨리 배웠다. 이 정도면 개발자에 베팅해 볼만한 거 아닐까?

이제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일을 할 마음은 딱히 없어졌다.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증권사 시절에도, 사업하던 시절에도 내 어깨의 짐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무엇이 세상에 임팩트가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개발을 조금 공부해 보니 내가 충분히 좋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개발 배우면서 공부 좀 해봐”

창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대표에게 이제 개발자를 하려 한다고 말했다. 마침 그 회사의 개발자 조직이 따로 분리되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시기였다. 분리된 개발조직에 나를 넣어 주겠다고 했다. 그간 같이 일해 본 내가 충분히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3개월간 일하고 인정을 받으면, 정직원으로 채용해 준다 했다. 이게 웬 떡이람, 배우면서 돈을 벌다니…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아침저녁 주말 꾸준히 공부했다. 3개월이 지났고 나는 정직원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장을 찾아 떠나다

극 초창기의 기업은 R&R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주니어 개발자가 명확하지 않은 R&R 하에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단 것은 좋지만, 내가 회사에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뭘 해야 할 줄 몰랐다. 회사와 나 모두를 위해 떠나는 것이 더 옳다고 느껴졌다.

때마침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라는 교육 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는 시기였다. 테스트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공부 좀 하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겠지. 뭐…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회사에 이야기하고 나와서 알고리즘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알고리즘 테스트는 풀었지만, 다른 문제에 막혀서 떨어졌다. 알고리즘 공부한 김에 대기업 코딩 테스트도 봤다. 코딩테스트까지는 통과해도 면접에 들어가니 지식이 부족해서 떨어졌다.

아찔했다. 괜히 개발자 한다고 했나? 그냥 블록체인 계속했으면 나 오라는 곳 진짜 많은데, 괜히 개발자 한다고 난리 피우다가 시간만 버리는 거 아니야? 이제 곧 30인데 이거 괜찮나? 불안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공부하는 건 자신이 있었기에 매일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반드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기업에서 일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더 기약 없이 벌어 놓은 돈을 까먹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내가 그간 쌓아 놓은 실력은 작은 스타트업에서 사용될 만한 수준이었다. 여러 곳에서 오퍼를 받고 작지만, 내실이 단단한 회사를 골라서 입사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최선의 결정이었는지 고민하는 대신, 이 결정의 최선의 결정으로 만들어 내기로 했다.

성장하다

좋은 회사였다. 보상제도도 합리적이었고 조직문화도 좋고 사람들도 착했다. 회사가 꽤 마음에 들었기에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다만 조직이 작은 만큼 대형 팀에서 수십 명의 개발자들과 협업하는 경험을 할 수는 없었다. 업무구조도 체계화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대신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막중했다. 베스트 프랙티스를 익힐 수는 없을지는 몰라도, 내가 직접 시장에 임팩트를 끼칠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개발자의 제일 근본적인 역량은 코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었다. 이곳은 내 근본적인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곳 이었다.

출근하기 전 2시간 동안, 퇴근 후 잠들기 직전까지 공부했다. 회사에서 작성한 코드를 다시 보며 어떻게 하면 더 잘 짤 수 있었을지 살폈고, 더 나은 코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부하고 적용했다. 꿈에 그리던 개발자가 되어 돈을 벌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다.

회사에서 점차 중요한 사람이 되어갔고, 내 실력과 자신감도 늘었다. 다른 약속이 있지 않은 이상 틈나면 공부를 하는 게 습관이 되어 매일 공부하는 게 별로 힘들지도 않게 되었다.

성취하다

“한 3년쯤 지나면 나도 N사 같은 곳에 갈 수 있겠지?”

N사를 지원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원을 한 것은, 한번 떨어져 본 다음에 어떤 점을 더 보충해야 하는지 피부로 느끼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왠걸? 서류에 합격했다. 코딩 테스트를 봤다. 문제가 쉬웠다. 느낌상 만점 이었다. 코딩테스트에 합격했다.

1차 기술 면접을 보았다. 평소에 아침저녁으로 공부한 내용과 자바스크립트 스터디에서 공부하던 내용을 많이 나왔다. 파인만 알고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문제를 적고, 골똘히 생각하고, 답을 내놓았다. 면접이 끝날 때 내가 사용하는 기술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1차면접도 합격했다.

2차 기술 면접은 CS를 물어볼 수 있다고 했다. 큰일 났다. 내가 제일 약한 부분이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비전공자를 위한 CS 추천 도서 라는 글이 있었다. 면접까지는 1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 재고 따질 거 없이 책을 몽땅 구매해서 읽고 또 읽었다.

개발자를 시작한 초창기에 알고리즘 공부를 많이 해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이었지만 이해가 금방 되었다. OS, 네트워크는 책을 여러 번 보면서 모든 디테일은 아니더라도 전체적 구성과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면접을 봤다. 준비했던 게 빛을 발했다. 더듬거리면서 대답을 어찌해냈다. 다음에는 내가 만든 웹사이트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게 여기서 티가 났다. 내가 실제로 만들면서 담았던 고민을 가감 없이 공유했고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결과는 처음 말했던 것처럼 최종합격.

대단한 비결은 없다

내 커리어 전환기를 다 이야기했다. 앞으로 더 고생하겠지만, 일단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왔다. 사실, 글을 쓰다 보면 뭔가 나의 비결 같은 게 도출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쓰고 보니, 딱히 비결이랄 것은 없다.

그저 순간순간 제일 중요한 것이 뭔지 고민했다. 제한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으로 옮겼다. 좋은 운이 오면 최대한 활용 했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당신도 나처럼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훨씬 운이 나쁜 환경에 처했다면 이런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임을 잘 안다. 인생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은 케이스 하나에 불과하다.

다만, 인생에서 매 순간 찍히는 점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나중에 뒤돌아보며 점을 연결할 때 훨씬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이야기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모든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기를 바란다.

ps. 더 디테일한 나의 성장 스토리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증권사 연구원 -> 블록체인 컨설팅회사 창업 -> 개발자. 커리어 전환의 달인입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꾸준히 하면 어디서든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개발 실력, 마음의 자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애쓰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사는 삶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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